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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서 벗어나 말씀으로 – 장재형목사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와 말씀 중심 신앙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9장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 에베소라는 고대 도시에서 일어난 우상숭배의 문제를 오늘날 교회가 여전히 경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우상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던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동은 단순히 고대 한 도시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고,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마주하는 현실적 문제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특정 신상을 조각하고, 그것을 기념품처럼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이렇듯 우상숭배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상업적 이해관계와 결합된 현상은 지금도 형태만 바뀐 채 얼마든지 발견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가 결국 "인간이 자기가 만든 대상을 신격화하여 그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주목하는 것은, 에베소에서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고 외친 순간에 일어난 대소동이 당시 사회와 경제 체제의 뿌리를 흔들 만큼 강력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단순한 '종교 갈등'으로만 바라보면 문제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은장색들이 반발한 진짜 이유는 "경제적 생존의 위협"이었고, 동시에 그들이 기득권을 유지해 온 방식을 뒤엎는 '복음의 힘'이 그만큼 실재적이었음을 방증한다. 결국, 우상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상이 가지고 있는 허무함과 그 배후의 맘몬에 대한 집착을 지적한 바울의 메시지가 문화적·경제적 충격을 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재 교회 현실에 대입시켜, "우리가 스스로 만든 어떤 제도, 의례, 전통, 심지어 교회 건물이나 재정을 우상화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우상을 만들고, 또 왜 우상을 찾아 예배하려 할까.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시편 115편이나 출애굽기 20장 같은 구약 본문을 사례로 들며, 하나님께서 이미 명백하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고, "어떤 형상도 조각하지 말고 그것에 절하지 말라"고 하셨음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말씀은 분명하게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붙들고 싶어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믿음이 듣는 데서 난다"는 본질을 망각하고, "보이는 것"에서 안도감을 얻으려는 나태함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장재형목사는 해석한다. 특히 그는 "말씀 중심 신앙"과 "보는 신앙"을 대조하면서, "우상은 보이는 대상을 통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을 채우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들음과 믿음을 통해 영적 깊이로 들어가게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의 사례를 통해 "우상숭배가 단지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신상에 대한 절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것은 곧, 자기가 만든 것을 신격화하여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고, 거기서 모든 의미와 안정감을 찾으려는 태도다. 현대 교회 안에도 이와 유사한 태도가 얼마든지 숨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웅장함에 몰두한다든지, 혹은 교회 내 특정 사역 방식이나 관행을 절대화하는 일 등이 모두 우상화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돈이나 성공, 명예, 사람의 칭찬' 등을 신처럼 섬기며 그것이 곧 축복의 척도라고 여길 때, 우상숭배의 근원인 '맘몬'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우상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기 때문에 쉽게 집착하는 반면, 말씀은 우리에게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요구하기에, 많은 이들이 우상을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장재형목사는 날카롭게 분석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우상숭배를 경계하고, 말씀 중심 신앙을 지켜 낼 수 있을까. 장재형목사의 해답은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묵상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에서 3년에 걸쳐 거하면서 제자들을 날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한 끝에 에베소 교회가 강건해졌고, 복음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말씀의 권위"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나 철학, 설득 기법이 아니라,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온 도시가 뒤집어졌고, 급기야 우상 조각상으로 부를 누리던 이들까지 위기를 느낄 정도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말씀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현대 교회도 이 말씀의 능력을 회복해야만,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하면서 속으로는 우상을 섬기는 이중적 모습을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장재형목사는 "우상숭배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우상을 중심에 둔 삶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나 시간을 차단해 버린다. 결국 삶 속에서 말씀을 들을 통로가 막히고, 기도의 자리가 메말라지며, 영적 분별력이 흐려져서 죄와 타협하는 문이 서서히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9장에서 분노한 군중들이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두 시간이나 외치는 광경은, 그들이 어떤 논리나 설득도 듣지 못할 만큼 감정과 집단적 열광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우상숭배가 점점 강화될수록, 사람들의 이성과 영적 감수성이 닫힌다는 무서운 결과를 보여 주는 예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흐름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으며, 교회 안팎에서 말씀을 등지고 시류에 휩쓸리면 결국 진리를 들을 귀마저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와 말씀 중심 신앙"은, 단지 교회 밖 세상에 대한 교훈만이 아니라, 교회 안 믿음의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할 실천 과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상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을 삶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대 교회가 유념해야 할 것은, 늘 말씀을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신앙생활의 뿌리이자 열매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 예배와 사역, 선교와 교육, 구제와 봉사의 모든 면에서 "말씀이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뿌리가 견고하지 않을 때, 결국 인간의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우상들이 세워지고, 그 우상은 새로운 형태의 독선과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에베소의 은장색들이 그랬듯, 오늘도 언제든 경제적, 문화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매개로 형성되는 거대한 "현대판 우상"들이 등장할 수 있다. 이럴 때 교회가 맞설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 말씀의 진리"뿐이며, 성도 개개인이 그 말씀을 매일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를 끊어 내는 유일한 길임을 장재형목사는 계속해서 설교를 통해 전하고 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사도적 자세
장재형목사는 우상숭배에 맞서는 교회의 태도를 말할 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도행전 전반에 나타나는 "복음 전파와 그에 대한 열정"을 주목한다. 에베소 사건에서 드러난 바울의 모습은, 단지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에베소뿐 아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나아가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치열한 도전과 박해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런 바울의 태도가 "사도적 자세"의 전형적 모델이라고 해석한다.

이 사도적 자세를 가늠하게 하는 대표적 장면 중 하나가, 바울이 군중의 광란 속에서도 "잡혀 간 동역자들을 구하기 위해 연극장 안으로 직접 들어가려고 했다"는 부분이다. 제자들이 이를 말리지 않았다면 바울은 기꺼이 목숨을 걸고 동역자들의 안위를 살피려 했을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복음과 동역자를 향한, 그리고 교회를 향한 지극한 책임감의 표현"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극도로 흥분한 군중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무모해 보이지만, 바울은 교회의 지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대 의식을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를 아끼는 마음, 복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결단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도 본받을 만한 태도라고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역설한다.

장재형목사가 또 하나 주목하는 대목은, 바울이 계속해서 예루살렘과 로마를 향해 전진한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19장 후반부와 20장에 이어서 바울의 여정은 종국에는 로마에 이른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유대인들이 공모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고, 때로는 배를 타고 항해하다 풍랑과 난파에 부딪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바울은 매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전진했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동역자들이 함께 움직였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복음이 확장되는 과정이 "개인 영웅의 뛰어난 리더십" 때문만이 아니라, "팀 사역, 혹은 공동체적 연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아리스다고,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등 여러 동역자들이 바울 곁을 지켰고, 또 각각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이 같은 사도행전의 기록은, 현대 교회도 "함께 가는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사도적 자세"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장면으로,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별설교를 예로 든다.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 불러 모아 "더 이상 당신들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바울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내가 떠난 후에 이리 같은 자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을 경고"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사도적 사랑이자 책임이라고 본다. 교회 구성원들을 끝까지 돌보면서도, 그들이 궁극적으로 의존해야 할 대상은 '교회 개척자인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성령'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리더십이나 그가 이룬 업적을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를 두고 떠나더라도, 그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성장시키실 것을 확신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사도적 겸손이자 성령에 대한 전적 의탁"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바울이 이런 장면에서 보이는 고난과 분투는, 장재형목사 설교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사역이 결코 편치 않다"는 인식을 우리에게 다시 확인시킨다.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고, 우상과 맞서 싸우려면, 반드시 세상의 반발이나 내부적인 갈등을 감수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뿐 아니라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지에서 끊임없이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극도의 위협 속에 놓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울은 결코 복음을 중단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태도가 사도행전 전체의 핵심 메시지라고 설명한다. 즉, 복음은 인간의 편안이나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러 갈 때, 그 길에는 위험과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세상에 드러나고,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며, 교회가 굳게 서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핍박의 상황에서 오는 유익"도 언급한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상황이 역설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고, 성도들이 '진짜 믿음'과 '형식적 믿음'을 분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의 소동 당시에도, 우상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잇던 이들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바울의 주장에 절대로 동의하지 못했으나, 결국 그 소요가 정리된 후 복음은 더 크게 뻗어 나갔다. 이처럼 분쟁과 대립, 심지어는 폭력의 위협까지도 복음의 확장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이 가진 "내적 힘"에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힘을 깨닫고,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도적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 이 사도적 열정과 자세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와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등지고 살 수 없는 만큼, 교회 안에 들어오는 수많은 세속적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날마다 경계하며,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흐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담대함과 지혜"가 모두 필요한데, 사도행전 19장에서 서기장이 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지혜로운 자의 역할"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무조건 전투적 자세로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 소동을 진정시키고, 그 틈을 타 복음이 지속적으로 전파되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대처했지만, 결코 핵심 진리, 즉 "우상은 신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사도적 자세"란,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복음 확장을 멈추지 않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근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현대 교회 구성원들이 갖춰야 할 태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울이 보여 준 공동체 사랑: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들을 끝까지 돌보고 격려하며, 위험 앞에서도 동료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둘째, 성령의 지도와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태도: 교회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며, 사람이나 제도에 기대고자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자각. 셋째, 주어진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실제적 실행: 바울은 지역마다 성도들을 세우고, 편지로 교제하며, 그들이 스스로 교회를 영적으로 책임질 수 있도록 훈련했다. 현대 교회도 성도들이 말씀에 뿌리내리고, 복음을 자신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실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말씀을 붙든 공동체"라면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도행전이 "교회의 처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에 투신했으며, 결국 로마에 이르러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사도적 자세를 지킨 이들이 있었기에 교회는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도 교회가 이런 모델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을 누차 설교에서 언급하면서, 쉽고 빠른 방법이나 세속적 성공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본래 가진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현대 교회와 선교의 방향
장재형목사는 에베소 사건과 바울의 사도적 태도를 현대 교회 선교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는다. 그는 교회가 단지 '종교 조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근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보듯, 복음이 들어가면 그 지역 사회의 문화, 경제, 종교적 구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는 교회가 지닌 본질적 영향력이며, 동시에 교회가 맞닥뜨리는 도전이기도 하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되, 결국 세상 체제의 심층부에 자리 잡은 우상(맘몬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이 충돌이 두려워 복음을 무디게 만들거나 타협해 버리는 교회가 되는 것을 경계하며, 오히려 사도행전적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되 스스로 세속화되지 않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재형목사가 보기에, 현대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은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단기적 사고방식"이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두어 달 복음 전파하다 '눈앞의 결과가 없으니 다른 도시로 옮기자'고 했다면, 에베소 교회는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2년 넘게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이 점진적으로 확산되도록 인내했다. 그 결과, 아시아 전체가 복음의 빛을 접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밭을 기경하듯 꾸준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한 영혼을 온전히 변화시키고, 한 도시의 영적 토양을 일깨우려면 대가 없는 열정과 헌신,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교의 방향에 있어서도 장재형목사는 "말씀 중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해외든 국내든, 교회가 선교 전략을 세울 때 종종 어떤 '마케팅 기법'이나 '행사 중심' 사역에 치우칠 때가 있다.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는 데에는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말씀으로 사람들을 세우지 못하면, 그 열매는 오래가지 못한다. 에베소에서도 우상을 부수고 불태우는 극적인 장면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 바울이 매일같이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친 기간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우상 물건들을 자발적으로 버리게 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가장 상징적인 예로 들며, "결국 인생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말씀의 힘"이지,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전부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또한, 현대 교회가 "우상 숭배 문화"와 맞설 때, 단지 비판이나 정죄의 언어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에베소 서기장이 소동을 잠재웠듯, 때로는 상식과 합법적 질서를 활용하는 접근, 혹은 문화적 대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다"는 복음의 진리는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태도를 "세상을 이해하되 물들지 않는" 영적 균형감각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셨지만, 결코 죄에 동조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교회도 적극적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되, 거룩함과 말씀 중심의 가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또 다른 현대 선교의 중요한 특징은 "복음적 네트워크"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결코 혼자 움직이지 않고 늘 동역자들, 혹은 앞서 세워진 교회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상호 협력했음을 볼 수 있다. 교회가 지역과 문화권을 뛰어넘어 한몸을 이루며, 서로가 겪는 어려움이나 필요를 나눌 때, 더욱 강력한 복음 선교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이 네트워크를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마치 초대교회의 편지와 방문이 그러했듯, 지금의 기술과 교통 환경 속에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제언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말씀과 성령에 대한 공통의 믿음"이며, 서로의 차이와 한계를 포용하면서도 진리 안에서 교제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는 특히 "음력 설 명절"과 같은 시점이 오면, 보통 사람들은 새해의 복을 기원하고, 풍습을 지키며 가족과 친지를 만난다. 이 문화 자체를 무조건 우상숭배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자칫 "복"의 개념이 물질적 번영이나 막연한 행복으로 축소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교회가 명절이나 연말연시, 절기 등을 맞이할 때마다 어떤 관습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복의 출처가 "위로부터 오는 은혜"라는 사실을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기회가 "한국 교회가 지닌 전통 문화와 기독교 신앙이 조화롭게 만나는 장"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전통이 우상화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경계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현대 교회의 궁극적 지향점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고,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선교의 지평을 계속 확장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 일행이 다녔던 도시에는 크고 작은 소요와 충돌이 빈번했지만, 결국 그 지역에 교회가 뿌리를 내린 후에는 놀라운 영적 갱신과 변혁이 일어났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이것이 지금도 유효한 원리임을 강조한다. 복음이 들어가면 당장 갈등과 반발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을 붙든 이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변화를 주도하여 문화와 삶의 양식이 달라지는 장면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역시 일제강점기나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 이런 경험을 통해 교세가 성장했으며, 교회가 사회 통합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하지만 이제는 번영에 익숙해진 교회가, 과연 계속해서 사도행전적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장재형목사는 "물질적 축복과 교세 확장에만 치우친 교회는 머지않아 영적 생명력을 잃고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고 경고한다. 반면, 우상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서며,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교회는 규모가 크든 작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공급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교회가 이끄는 선교 운동은, 단지 '숫자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지역사회를 성화시키는"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현대 교회가 선교에 임할 때, 장재형목사가 조언하는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교회가 철저히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 힘으로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아가되, 오히려 세상문화를 정화하고 새롭게 만들어 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19장과 20장,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바울의 전파 과정을 곱씹어 보면, 이 두 축이 동시에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맞이한 수많은 도전-가령 세속화, 종교다원주의, 소비문화, 미디어 환경의 급변 등-앞에서, 결국 해답은 에베소 소동에서 바울이 외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될 수 없다"는 고백,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이야말로 교회가 붙들어야 할 기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확신을 실제 삶에서 구현하려면 거듭 '말씀'을 파고들어야 하며, 말씀 앞에서 나 자신부터 철저히 낮추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의 모임이 교회이고, 그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선교를 이끌어 가는 공동체가 된다.

정리하면,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19장과 20장을 통해 전하려는 주제는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우상숭배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에베소 사건을 통해, 우상을 배격하고 말씀에 의존하지 않으면 교회는 본질을 잃는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둘째,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사도적 자세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수많은 방해와 박해 앞에서도 복음을 계속 전진시킨 저력을 현대 교회가 본받아야 한다. 셋째, 현대 교회와 선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구체적 실천이다. 이는 말씀을 중심에 두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문화와 대화하면서도 진리는 타협하지 않는 전략적 접근, 그리고 교회들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네트워크형 사역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자칫 복잡한 이론이나 성과 지표에만 매달려 선교를 '프로그램'처럼 운영하게 되지 않도록 거듭 경계한다. 에베소와 고린도, 빌립보, 로마에 이르는 바울의 여정은 결코 화려하거나 시스템적으로만 완벽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 순간 닥치는 어려움을 기도로 돌파했고,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들과 아픔과 기쁨을 나누었으며, 무엇보다도 교회가 말씀 안에 세워질 수 있도록 애썼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도적 여정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도 이 발자취를 따라갈 때, 비로소 우상 숭배의 도전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에서 시작된 우상충돌의 이야기는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로 이어지는 길에 오른다는 사실로 확장된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사건의 진행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복음을 온 땅에 전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사도행전 1장의 선언이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구현이 한 시대에 그치지 않고 21세기에도 계속된다고 강조하면서, 교회가 우상숭배의 다양한 형태에 끌려다니지 않고, 말씀을 붙들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의 빛을 밝히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한다고 종종 설교에서 당부한다.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장재형목사" 자신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말씀 중심, 우상 거부, 복음 전파, 사도적 열정,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그는 사도행전 19장과 20장을 찬찬히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교회가 우상의 도시인 에베소를 복음의 전초 기지로 바꾸고, 여러 지역과 문화권을 향해 복음을 확장해 갈 수 있었는지를 오늘날 시점에 맞추어 설파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세상 어느 곳이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자 하는 마음을 품을 때, 우상을 무너뜨리고 교회가 새롭게 태어나는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붙드는 교회와 성도라면, 어떤 시대적 혼란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진하며, 사도행전적 교회의 전통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