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드러난 무조건적 사랑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복음서 중 마가복음 14장 3-9절, 마태복음 26장 6-13절, 그리고 누가복음 7장 36-50절, 요한복음 12장 1-8절 등에서 조금씩 다르게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들이 공통적으로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가복음 14장 3-9절을 중심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한 여인이 값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는 장면이 드러납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사랑의 본질을 두고 하신 선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주님의 희생적 사랑'과 '인간이 돌려드려야 할 헌신'이라는 주제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막14:3)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당시 문둥병은 격리되어야 할 심각한 질병이었으며,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철저히 공동체 바깥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 시몬을 직접 찾아가셨고, 치유하셨으며, 결국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기존 질서와 통념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식사하기를 꺼리지 않으셨고,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조차 가까이하여 품으셨던 것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두고 '주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자의 자리로 내려오셨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누구도 범접하기 어렵다고 여겨진 문둥병자조차 예수님의 손길을 받았다는 사실에 신앙의 핵심이 있다'고 역설합니다. 곧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버려진 자를 찾아가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며, 끝내는 함께 식사를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단지 '한 여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12장 1-3절에 의하면 그녀는 마리아로 밝혀집니다. 마리아는 나사로의 누이이며,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은혜를 몸소 체험한 인물입니다.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뚜껑을 열거나 조금만 덜어 붓는 정도가 아니라, 그 옥합 자체를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막14:3). 그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 즉 당시 노동자의 일 년 치 품삯에 달하는 큰돈이었기에, 사람들은 이 사랑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아름다운 일'(막14:6)로 칭찬하십니다. 여기에서 '값비싼 향유를 쏟아붓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상징입니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듯, 사랑은 계산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사람의 눈에는 헛되고 너무 많은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계산을 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런 '허비의 지경'까지 가야 할까요?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팔레스타인 문화에서 귀한 향유를 담는 옥합은, 주로 죽은 자를 장사할 때 시신에 발라주는 용도로도 활용되었습니다. 향유 자체가 최고급이기도 했지만, 옥합 또한 귀중히 여기던 그릇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조금도 아까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옥합을 깨뜨림으로써 '주님께 나의 전부를 드린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부어지는 향유는 예수님의 온 존재를 향한 헌신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두고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십니다(막14:8). 주님의 죽음은 '허비'가 아니라, 죄인을 살리고 문둥병 같은 영적 부패 속에 갇힌 인류를 회복시키는 결정적 희생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드라마 속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생명 자체가 무조건적 사랑의 정점이며, 그 사랑을 진실로 깨달을 때, 마리아처럼 전부를 드리는 헌신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여인의 헌신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 왜 낭비하느냐'(막14:5)라며 책망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6장 8절에는 이 행동을 본 '제자들'이 분을 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12장 4-5절에서는 그중에서도 가룟 유다가 앞장서서 여인을 탓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룟 유다가 돈을 맡아 관리하면서 거기서 종종 횡령을 했다는 사실(요12:6)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위선적인 외침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 앞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행위를 '실용성'과 '이성적 계산'으로 가늠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이미 세속적 욕심이 스며들기 쉽다"고 경계합니다. 즉, 진정한 사랑은 계산으로 환산되지 않으며,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본질 자체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판하거나 분노한다는 점에서 제자들과 여인의 태도는 극명히 대비됩니다. 마리아는 울며 옥합을 깨뜨렸고, 그 결과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찼습니다(요12:3, 눅7:38). 반면 제자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듯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수치를 떠올리며 손익을 따졌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마음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가치를, 그들은 인간적 계산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께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받은 제자들이었음에도 그 사랑의 영광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면, 오히려 가장 극렬하게 무모함을 비난하는 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은혜를 오래 받아온 신자일수록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늘 교회 안에 있고,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며, 봉사에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놓치면 제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14:7)고 말씀하시며, 이 여인의 행위가 지닌 가치를 두둔해 주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배려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여인의 사랑이 내 죽음을 준비하는 절대적 사랑으로서 더없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랑의 절대성을 변호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이 '낭비로 보이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완성됨을 암시하십니다. 그리고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고 선언하심으로써,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성도들이 이 사건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설교하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혹은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할 때 조금이라도 '이게 효율적인가, 너무 과한 건 아닐까' 하고 계산하려 든다면, 이미 복음의 영광과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곧 사랑이란 끝까지 주고 또 주는 것이며, 때로는 허비처럼 보이는 헌신 안에서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고,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문둥이 시몬이 회복된 후 주님께 식사를 대접했던 사실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시몬이 문둥병을 치유받고 그리스도께 감사했듯, 우리도 각자의 죄와 상처 속에서 치유된 후,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내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무한하기에, 우리 또한 최대치로 드리려는 열망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값비싼 옥합을 깨뜨리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리는 모습은, 단지 물질적 헌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온 감정, 시간, 재능, 생애 전부를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 총체적 헌신을 상징한다. 이 헌신은 사랑을 기반으로 할 때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께 올려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울러 누가복음 7장 37-38절에 나오는 사건도 함께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죄인인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은 예수님의 발곁에 와서 울며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고 입맞춥니다. 이 사건 역시 사랑이 무엇인지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장 귀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는 모습은 '사랑이 신분을 초월한다'는 진리를 잘 나타냅니다. 당시 여인은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에서 배척받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돌아보시며 오히려 바리새인에게 "이 여인이 내게 보여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가르치십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월감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예수님께 제대로 된 사랑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죄인인 여인은 예수님께 최선을 다해 헌신했고, 그 헌신 자체가 주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교회 안에서 우리의 배경이나 지식, 종교적 경력, 또는 세상적 직분이 아무리 높아도, 진실한 사랑이 빠져 있다면 우린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섬기는 척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오직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되고, 죄와 병에 시달리는 자에게까지 임한다'는 복음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인의 '옥합을 깨뜨린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을 거울처럼 반영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주셨듯, 여인도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설교할 때,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기에(요13:1) 우리도 끝까지, 아낌없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자주 상기시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의 시작과 끝은 결코 '계산적인 조건'이나 '효율성'에 있지 않고, 오직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Ⅱ. 사랑을 계산적으로 보는 제자들의 시각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사랑의 허비'를 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4-5절에서 어떤 사람들, 즉 제자들은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8-9절에서도 제자들은 "왜 허비하느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느냐?"라며 분노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선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바리새인이 '이 사람이 참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누구며 어떠한 죄인인 줄을 알았을 것'이라며 예수님의 모습을 비난하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 4-5절에서는 가룟 유다가 직접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바리새인, 가룟 유다 등 다양한 인물이 서로 다른 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사랑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 깃든 영적 가치를 계산적 시선으로 폄하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들이나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를 거론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이 강조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신15:7-11).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들은 '이 귀한 향유가 정말 아깝다. 너무 비효율적이다'라는 불만을 표출하면서, 가난한 자 구제라는 명분을 들이밀었습니다. 즉, 이들의 비판은 표면적으로 '가난한 자를 돕자'라는 정의로워 보이는 구호였으나, 실제 동기는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처럼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그 돈을 종종 훔쳤다고 되어 있고, 그 이면에는 탐욕과 이기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자신들의 욕심이나 계산으로 바라보면, 언제든 거기에 혐오감이나 시기, 혹은 분노가 끼어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막14:7, 요12:8)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가난한 자를 돌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명기 15장 11절을 인용하신 이 말씀은, '가난한 자는 늘 존재하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이 사랑의 행위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취지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에 대해 "주님을 섬기는 일과 이웃을 돕는 일은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다. 다만, 참된 구제와 섬김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는 행위는 그것의 상징이며, 이 행동을 '허비'라고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영광을 아직 맛보지 못한 자다"라고 설명합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이 사건 후 마귀에게 붙잡힌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반하는 길로 들어섭니다(막14:10-11, 요13:2). 결국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고, 그 대가로 큰 절망과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어째서 사랑을 부어드리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배반이 등장하는 것일까?'를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대비를 통해, '사랑의 극치가 드러나는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사탄의 역사가 함께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오해하거나, 사랑 앞에서 마음이 뒤틀리면, 인간은 극단적 어둠으로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0-11절을 보면, 유다가 떠나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모색했다는 사실이 즉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자주 언급하며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거절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는 데까지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도 참된 사랑의 능력을 외면하면, 주님을 멀리하는 배반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은 반드시 감동을 낳고, 그 감동은 더 큰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여인의 향유가 집 안에 가득 퍼지자, 그것을 보고 느낀 사람들의 반응은 양 극단으로 나뉩니다. 주님은 여인의 헌신에 감동하여 그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왜 허비하느냐'고 분노하며, 결국 유다는 배반이라는 최악의 길을 택합니다. 사랑의 본질이 드러날 때, 사람의 숨은 동기도 함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더욱 감동하고 은혜를 받으며, 그 사랑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보다는 이익과 계산을 앞세우는 자는 '저 행위가 왜 필요한가? 너무 비이성적이다'라며 따지고 비판하다가, 급기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이르기도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 안에서 사랑을 체험한 자는 '아, 나도 저렇게 주님께 드리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거기에 도리어 불편함을 느끼거나, 지나친 열정이라며 미워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때로는 뜨거운 헌신을 행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간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고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일'뿐"이라고 설파합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떠올려보면, 사랑은 늘 비효율적인 모습처럼 보입니다. 양 백 마리 중 하나를 잃었을 때, 아흔아홉을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서는 목자의 행위는 경제 논리로 보면 어리석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 위해 불을 켜고 온 집안을 뒤지며, 찾은 뒤에는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이는 여인의 모습도 '잔치 비용이 더 들 텐데'라는 생각으로 보면 무모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가산을 털어 떠나버린 아들을 다시 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여는 것도 효율적 관점에서 보면 낭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 사랑의 실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바로 '조건 없는 사랑',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는 무한한 용납의 마음, 그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전부를 기뻐함'이라는 논리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때론 미련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미련하신 사랑, 허비 같아 보이는 사랑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랑을 안다면, 결코 여인의 향유 부음을 허비라고 말할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가 여인의 희생을 보고 분노한 것은, 자기들이 누려왔던 사랑의 실체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되, 때론 그들의 무지와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품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사랑을 '낭비'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들이 차마 해보지 못한 극단적 헌신 앞에서 묘한 열등감이나 시기심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모습'을 보게 될 때, 동시에 내 안에 자리 잡은 '계산적 태도'나 '욕심'을 들춰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 중에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지적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향해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면, 그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지만 속으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건 좀 과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복음이 지닌 능력과 사랑의 신비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의 허비와 제자들의 계산적 시선을 대조해보면, 신앙인은 반드시 '여인의 길'을 선택해야 함을 배웁니다. 즉,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전부를 아낌없이 쏟아놓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데 있어서는, 효율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헌신의 절대성'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미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시어, 문둥이 시몬과 죄인들을 품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다 내어주셨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의 본을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드리는 것이, 곧 베다니 여인의 삶이며, 이것이 복음이 전하는 참 의미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종합하여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완전히 허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아무 쓸모없이 죄 가운데 헤매던 인간을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피를 흘리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며, 죄인인 우리가 거듭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돕고, 교회 사역을 하고, 세상을 섬기는 모든 과정에서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봉사나 구제는 결국 외식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이 앞서면, 세상의 이치를 넘어서는 희생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고,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눈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드러난 사랑은 하나님의 때에 적합하게 사용되어 '장사를 예비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아름답게 쓰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오해와 비난, 그리고 가룟 유다의 배반을 생각하면, 우리 역시 교회 안과 밖에서 다른 이들의 헌신을 폄훼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의 방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함부로 비판하거나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고 비아냥거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를 함께 기뻐하고, 동참하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함께 지체된 성도가 열정적으로 주님께 무언가를 드릴 때, 그것을 '왜 저렇게 지나친 헌신을 하지?'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마음은 이미 제자의 길에서 미끄러져 가룟 유다의 길로 갈 수도 있다"고 일깨웁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충만해지려면, 서로를 바라보며 격려하고, 그 사랑의 열매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펼쳐진 사건은, 주님이 죄와 상처 속에 있는 자를 찾아가시는 극진한 사랑으로 시작되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린 한 여인의 무조건적 헌신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비난하고 분노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계산적 태도'를 거울처럼 보여줍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 사건을 주목하면, 주님께서 그 사랑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평가하시며, 온 천하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위를 기념하라고 하신 까닭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적 기준으로 허비처럼 보여도, 실상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리고, 치유하고,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옥합을 깨뜨릴 수 있고, 거기서 비롯된 향유의 향기는 모든 곳에 퍼져나가 복음의 실체를 증거합니다.
결국 이 본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어떻게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교회나 세상에서 혹자는 우리의 헌신을 두고 '쓸데없는 일'이라거나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했고, 그 무조건적 은혜로 인해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신한다면, 사랑을 '허비'라 부르는 그들의 소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기쁜 마음으로, 나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 행위는 결코 낭비가 아니며, 주님은 그 헌신을 통해 오늘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우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은 세상적 가치로는 측정 불가능하다. 계산으로 헤아릴 수 없는 천상의 가치가 거기에 담겨 있다"고 재차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헌신하고, 결국 세상에 복음의 향기를 풍길 수 있다고 결론지어 줍니다.
이처럼 두 소주제 안에서 우리는 장재형 목사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 곧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을 본받아 전부를 드릴 때 절대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은 때로 미련해 보이고, 허비처럼 여겨지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며, 우리를 살리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베다니 문둥이 시몬'처럼 주님을 만나 치유받고, '마리아'처럼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또 '제자들처럼 미련하여 사랑을 놓친 모습'을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 각 사람의 삶에,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바로 이 '허비 같아 보이는 사랑'을 다시금 붙드는 것이며, 이를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그 지점에서 우리 모두를 초청합니다. "여인의 헌신은 곧 복음이요, 복음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우리 각자가 걸어가야 할 거룩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