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마귀의 계략과 배반의 현실
요한복음 13장 2절에서 11절은 '최후의 만찬'으로 불리는 장면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돋보이는 본문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섬김이 얼마나 철저하며, 동시에 제자들의 연약함이 얼마나 깊은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이 죄에 빠지기 쉬운 실존임을 분명히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끝까지 사랑하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주님은 원수까지 품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사랑의 신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신다"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가룟 유다라는 배반자가 함께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그를 끝까지 붙들고자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의 죄와 배반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가 드러나고 있음을 설파합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 예수님의 원수이자 배반자라 할 수 있는 가룟 유다가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증언합니다. 만찬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자리에, 이미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가 앉아 있었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를 통해 요한이 보여주고자 하는 극적인 대비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과 가룟 유다의 '끝없는 배반'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 자리에 자리 잡은 유다는 겉으로 보기에 다른 제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을 배신하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마귀가 노리는 가장 큰 목적은 주님과 제자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순간부터 사탄은 그 틈을 파고들어 '불신'을 심고, 형제들 간에 '배반'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관계를 배신하고 팔아넘길 것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최후의 만찬' 자리까지도 마귀가 침투할 수 있다는 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가장 거룩한 자리에 앉아 있고, 가장 거룩한 음식을 나눈다 할지라도, 마음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다면 언제든지 죄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다른 제자들은 유다의 속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에 보면, 결국 유다는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신 후에 '곧 나갔으니 밤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밤이러라'라는 표현은 단순한 시간적 정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대체로 '빛과 어둠'을 대조하는 문학적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데, 유다가 빠져나간 시간은 '어둠의 세계'에 들어섰음을 상징합니다. 이 '밤'은 영적인 어둠, 배반의 어둠, 사탄의 계략이 구체화되는 어둠으로 해석됩니다. 더욱이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지내며 놀라운 기적과 가르침을 직접 체험한 자가 끝내 '배반의 밤' 속으로 떠나갔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왜 이런 무서운 배반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보면, 그 근본에는 죄성이 자리합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의 영향 아래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재정을 담당했던 사람이었고, 여러 상황을 통해 물질적 야망이 그 안에서 꾸준히 자라나고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고자 했던 가장 구체적인 동기는 은 삼십에 대한 욕심과 실망, 혹은 정치적 메시아 기대가 깨졌다는 낙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 마음에 들어온 '배반'의 씨앗은 결국 싹이 나서 끔찍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다의 배반에서만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정황을 보면, 다른 제자들 역시 그리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 따르면, 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큰지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라는 극단적인 죽음을 앞두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히려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주님의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제자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기보다 자기의 이득과 높임을 추구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그 자리에 마귀가 유다에게 들어가 배반을 야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였다"라고 지적합니다.
인간은 위기 상황이나 불안이 닥칠 때 종종 자기 문제에만 갇히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극심한 고난과 십자가를 앞두고서도 여전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정작 제자들은 서로 다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유다는 그 사랑을 등을 지고 어둠으로 사라졌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겹쳐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막상 삶의 자리에서 어려움이 오면, 자아를 내려놓기보다 쉽게 분노하고 불신하며 형제를 미워하기도 합니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가룟 유다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여러 해 동안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겉모습으로는 참된 제자처럼 보일지라도, 안에 여전히 죄의 소욕이나 세상적 탐심이 떠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그릇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회개와 정결함이 필요하다"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견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3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는 말씀 속에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두 가지 차원을 알려줍니다. 첫째, '이미 목욕한 자'라는 표현은 중생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근본적인 깨끗함, 곧 원죄에서의 해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발'은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 먼지와 때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이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자범죄' 혹은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짓는 죄악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발이 더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발은 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음으로 다시 깨끗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중생 이후에도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발 씻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라고 역설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모든 죄와 씨름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육체의 소욕과 세상 풍조가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님 앞에 나아가 씻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유다와 같은 어둠에 사로잡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주님과 상관 있는 자"로 남으려면 발을 씻어야 한다, 다시 말해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히려면, 먼저 죄의 때를 씻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회개의 과정을 도우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엎드릴 때마다 우리의 '발'을 씻기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가 곧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의 죄는 결코 씻길 수 없고, 예수님의 보혈 없이는 진정한 정결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 주님의 씻김의 은혜를 되새기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나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며, 동시에 내게 허락된 '원수'나 '불편한 형제'까지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는 시기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자신이 이미 목욕한 자, 곧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발을 씻어야 한다. 날마다 회개함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상실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라고 조언합니다. 또한 혹시 교회 안이나 가정 안에 미움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진 않은지, 내게 가룟 유다와 같은 어두운 마음이 잠재되어 있진 않은지를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이미 목욕한 자'와 '발을 씻어야 하는 자'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은 우리 신앙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중생으로 말미암은 근본적인 깨끗함, 그리고 회개로 말미암는 일상적인 정결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이미 배반을 결심했음에도 끝까지 붙들고자 하셨고, 그의 발도 씻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외면하면,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주셔도 결국 내 마음이 완악해져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다"라는 경고가 됩니다.
동시에, 장재형목사는 "이토록 철저한 배반 속에서도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붙들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이 유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듯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 가운데 방황하거나 연약하여 죄에 넘어질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더러운 발을 씻기려고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결국 발 씻김의 문제는 "내가 순종하며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발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발을 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로 귀결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하나의 상징적 이벤트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만찬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사건입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찬에 참여하는 자 가운데 '유다'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한 그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관심한 형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회개와 정결함, 서로 돌봄이 있어야만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식탁'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측면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던 열두 제자의 '발'을 친히 씻기셨습니다. 당대 문화적 배경을 보면,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일은 주인이 아닌 종이 담당하는 일입니다. 랍비와 제자의 관계에서도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길 수 있으나, 반대로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경우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낮아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이 이런 종의 역할을 하지 않고 다툼만 하고 있는 현장에서 스스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여매셨습니다. 이것은 '섬김'이란 말로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최고의 지위에 계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충격적 광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메시지는 그저 한 번의 '행동 시범'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십니다(요 13:14). 즉, 주님을 따르는 자라면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아야 함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발을 씻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겸손함을 보여주라는 의식적 제스처가 아니라, 형제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하고 품어주며, 그 더러운 부분을 대신 씻어주는 구체적 사랑을 하라는 뜻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서로의 발을 씻어줄 줄 아는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곧, 서로가 서로의 연약함을 덮어주고, 죄를 지었을 때 함께 회개하며, 넘어졌을 때 도와 일으켜주는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사탄이 틈타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연결된 이들이 서로 대적하고 분열하기보다는, 누구 하나가 흔들릴 때 모두가 함께 붙잡아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종종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 영광을 추구하거나, 다른 이의 실수를 들춰서 모략을 펼치거나, 험담과 미움이 난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은 '사탄의 생각'이 들어와, 공동체를 무너뜨리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그토록 가까운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자가 되었다면, 오늘날의 공동체라 해서 안전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11절은 가장 거룩하고 은혜로운 식탁에서조차 배반자가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섬김이 그 어두움을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깊이 묵상하고, 우리 자신도 "주님 앞에서 발을 씻어야 하는 자"임을 날마다 인식한다면,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이웃, 심지어 나를 모함하고 배반하는 원수까지도 품고 섬길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결국 사랑이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십자가는 그 사랑의 최종 결정판"이라고 요약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 죄를 대신 지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낮아짐의 본을 통해 '십자가 정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정신이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을 돌려대는 것'을 포함해 더할 나위 없이 낮아지는 종의 태도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가치관이 참된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며, 사순절에서 부활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3장의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씻김을 받고 날마다 회개함으로 주님과 상관있는 자로 살고 있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내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는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를 자문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 찬양, 사역 등 외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정작 이런 '발 씻음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씻어야 할 만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 발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도 씻어줘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배반과 분쟁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공동체'가 세워질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죄성과 마귀의 계략, 그리고 배반자가 함께한 최후의 만찬 상황을 바라보면,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다의 배반을 돌이키려 애쓰셨던 은혜가 있기에, 오늘날 우리의 연약함도 주님 앞에서 새롭게 회복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요한복음 13장이 지닌 깊은 메시지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의 핵심입니다. 결국 그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가가 신앙의 성숙을 좌우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가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그 발을 날마다 씻음으로 더욱 깨끗해져야 한다는 명령이요, 동시에 서로를 위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하는 실천적 과제"라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배반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 사랑으로 씻김을 받으며, 다른 이를 섬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Ⅱ. 끝까지 섬기시는 사랑과 발 씻김의 의미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발 씻김의 행위는, 배반자가 함께한 최후의 만찬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라는 말씀은 신앙 공동체와 개인의 구원론, 그리고 성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요 13:14)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지침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새로운 공동체 윤리의 탄생"이라고 부르며, 십자가 정신이 곧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길이라고 해설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미 목욕한 자"라고 표현하신 것은, 신약 신학에서 말하는 '중생(重生)'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근본적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 '목욕'이란 인간 쪽에서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여된 은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합니다(엡 2:8).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욕한 자라도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미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세상 속을 살아가는 동안 죄의 먼지와 때에 쉽게 휘말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해, 구원은 한 번으로 완성되지만(once for all),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본성은 계속해서 죄를 짓게 만들고, 우리의 발은 늘 더러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 씻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날마다 드리는 회개'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삶을 성결하게 가꾸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원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 속의 유혹과 사탄의 간계,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이 만나면 순간적으로 넘어지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을 살피고, 죄를 씻는 회개를 반복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선언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난 뒤에도,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노려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만들려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깨어서 자신을 살피고, 말씀과 기도로 발을 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중생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주님과 관계가 멀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발 씻음은 신앙의 성숙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영적 퇴보나 심지어 배반까지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명령을 남기셨습니다(요 13:14~15). 이것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주는 함의는 매우 큽니다. 교회는 단지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정결케 하는 성령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언제나 회개와 용서가 살아 있어야 하고, 죄의 문제가 드러났을 때 서로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사람을 씻어주고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교회 안에 갈등이나 분쟁이 일어날 때, 우리는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며, 심지어는 분리되는 극단적 사태로 치닫는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3장의 원리를 따르면, 그런 때일수록 서로 섬기고, 발을 씻어주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인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구도 나서서 '종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을 때, 주님이 먼저 대야에 물을 떠서 무릎을 꿇고 제자들 발을 닦으셨습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고, 한편으로 인간 교만을 뚫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겸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자리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결국 어둠으로 나가고 말았습니다(요 13:30). 이는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준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이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어지지만, 인간이 마음을 완강히 닫아버리면 결국 어둠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쪽에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매우 강조하면서, "교회는 끝까지 사랑하며 섬기되, 배반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상처 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섬김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 그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오래 참음'과 '끝까지 품음'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또한 발 씻김은 서로 겸손해지는 체험을 가져다줍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님의 모습은 위계와 권위의 세계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랍비이자 주인이신 분이 몸을 굽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닦으시는 모습은, 세상이 말하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분이 가장 비천한 종의 자리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빌립보서 2장이 말하는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길과 맞닿아 있습니다(빌 2:6~8).
그리스도인의 위대함은 '섬김'을 통해 나타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 20:26)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면, 교회 안에서 높아지려 하는 이들, 교권을 사모하거나 명예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요한복음 13장의 장면은 큰 도전을 줍니다. 주님의 길은 자기 과시의 길이 아니라, 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발 씻김의 정신을 진정으로 실천한다면, 교회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점차 사라질 것이며, 서로에게 은혜가 되고 빛이 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구원의 확신 속에서도 날마다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함을 잊지 말라는 경고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으니, 내 삶에 더 이상 회개가 필요 없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본문의 가르침과 정반대입니다. 분명 우리 존재와 신분은 예수님의 보혈로 '근본적인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죄로 인해 발이 더러워질 수 있으므로, 늘 씻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죄의 멍에에서 끊어내셨으나, 우리가 세상에서 호흡하는 한 죄의 먼지가 계속 날라와 우리 발에 쌓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먼지를 즉시 씻어내야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라고 말하며, 구원 이후의 성화 과정이 결코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됨을 역설합니다. 사실 구원을 받았음에도 죄의 굴레에 사로잡혀 지속적으로 넘어지는 성도들을 보며, "왜 저렇게 불완전할까?" 실망할 수도 있지만, 바로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발 씻음"이라는 실제적인 회개와 정결 예식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은 "주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발을 씻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하신 구절이 그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스승 되신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겨주시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기에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강하게 반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거절한다면, 내가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결국 베드로로 하여금 "주여, 그러면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옵소서"(13:9)라는 고백을 이끌어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겸손의 주님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처음에는 베드로가 "어찌 주께서 종의 일을 하십니까?"라고 강한 자존심을 드러내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그렇다면 아예 내 전부를 씻어주십시오"라고 완전 항복을 합니다. 여기에는 '은혜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경건함이나 자존심이, 베드로처럼 "절대로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며, 은혜를 받지 못하면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렇듯 발 씻김은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영적 행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발의 먼지를 털어내려고 애쓴다고 해서 완전하게 깨끗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허리를 숙여서 내 발을 씻으시겠다고 할 때, 나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저를 씻어주옵소서"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를 다시금 잔치 자리에 앉도록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이야기는 사순절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평생 여정에서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죄에 발목을 잡히거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날 때, 주님 앞에 나아가 발을 씻고,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공동체적 사랑을 실천한다면, 은혜의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의 현장에서도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 가운데서 자기 유익이나 자존심을 내려놓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자기 비움에서 오는 역설적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십자가의 길, 발 씻김의 길은 고난과 자기 부정의 길이지만, 그 길을 통과할 때 참된 부활과 영광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지만, 그 승리로 가는 길은 발 씻김과 십자가라는 철저한 낮아짐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길을 따르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영광을 재확인시키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 남아 있는 죄와 싸우고 회개해야 함을 절실히 일깨워줍니다. 나아가 그것이 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씻어주는 '공동체'의 문제임을 알려주므로, 교회가 서로 돌보며 함께 성장해야 함을 촉구합니다.
첫째로 '이미 목욕한 자'라는 구절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중생했음을 선언합니다. 둘째로 '발을 씻어야 한다'는 명령은 여전히 연약한 우리의 일상적 죄를 정결하게 씻어야 한다는 겸손한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교회 안에서 서로 섬기고 사랑으로 돌보며, 심지어 배반자에게도 끝까지 사랑을 베풀라는 예수님의 모범입니다. 넷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선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결국 '주님과 상관없이' 어둠으로 빠져드는 것이고, 주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나 인간이 완고하게 거부할 경우 유다처럼 멸망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메시지는 장재형목사가 누누이 말해온 것처럼 "교회 안에는 언제나 '발 씻김'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이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요지로 요약됩니다. 성도들은 서로의 발을 씻어주고, 개인적으로도 날마다 주님 앞에 발을 씻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화와 공동체적 일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길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2~11절을 통해 우리는 '인간 죄성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함께 목도합니다. 유다는 배반자의 길로 갔고, 다른 제자들은 다툼에 빠졌으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조용히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여, 우리가 "주님의 손길이 아니면 발을 씻을 수 없는 자"임을 자각하도록 만듭니다. 동시에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서로의 발을 씻어줘야 한다"라는 공동체적 사명을 확인케 합니다.
믿음 생활에서 종종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됐다"라는 안일함에 빠지거나, 혹은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섬기느냐"라는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요한복음 13장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 사랑의 길을 걸을 때, 결국 교회 안의 모든 분열과 갈등을 잠재우는 힘이 십자가와 그 발 씻김에서 비롯됨을 알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땅의 교회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발 씻김의 본을 날마다 실천하고, 사순절의 메시지를 통해 죄를 회개하며 서로를 용납할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참된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세상은 교회의 화려함이나 수적 성공, 세속적 권세에 감동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사랑의 모습, 곧 진심어린 용서와 섬김, 희생을 볼 때 비로소 감동하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길잡이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선언 속에는 구원의 확증과 날마다 씻어야 하는 성화의 과제, 그리고 서로 섬김이라는 교회의 윤리가 모두 집약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속에서 일어난 배반과 다툼의 현실은 비록 참혹했지만, 주님의 끝없는 사랑과 겸손으로 인해 새로운 소망의 장이 열렸습니다. 오늘을 사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사건을 곰곰이 묵상하며,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발 씻김을 본받아 서로를 섬긴다면, 진정한 부활의 기쁨이 더욱 분명히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해온,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를 씻고, 그 사랑을 서로에게 나누며, 끝내는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신앙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