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각자의 성격, 은사, 역할이 다를 뿐 아니라, 신앙의 단계나 신앙의 방향성 또한 저마다 다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 된 교회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서로를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 곧 성령의 역사가 공통적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와 직분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치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모두 한 성령과 한 주님 안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Charisma)"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카리스(charis)'에서 파생된 단어다. 즉, 은사는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내는 재능이나 재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특정인에게 부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 은사는 하나님의 창조적 다양성 안에서 각 사람에게 독특하게 주어진다. 누군가는 예언의 은사를, 또 누군가는 가르침의 은사를, 또 다른 이는 봉사의 은사를 받아 교회 안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하나의 몸을 이루어 간다.
장재형 목사는 이와 같은 교회의 다양성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고 자주 강조한다. 그는 성도들이 제각기 다르게 받은 은사를 활용해 교회를 섬길 때, 교회는 삶의 자리에서 '유기적 몸'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어떤 하나의 신체 기관만 계속 강조하거나, 혹은 특정 직분만을 과도하게 부각한다면, 교회의 몸 전체가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손이 될 수도, 발이 될 수도, 눈이나 귀 같은 지체가 될 수도 있다. 바울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서로 다른 은사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교회라는 몸 전체가 강건해짐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교회 안의 기둥 같은 직분들을 열거하면서, 각 은사와 직무가 분산되어 있다 해도 그 근거와 근원은 '한 분이신 주님'임을 분명히 한다. 또 에베소서 4장 11~12절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고 선언한다. 여기서도 교회의 모든 직분과 은사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이 재차 강조된다. 결국 교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직임과 은사의 공통된 결론은 봉사이다. 단지 헌금 봉사, 구제 봉사, 행사 봉사 같은 눈에 보이는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섬김, 말씀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위로,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을 높이고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중재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봉사의 범주 안에 속한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집사(디아코노스)'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초대교회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구제와 돌봄이 필요한 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사도들은 말씀 사역과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더 이상 구제 사역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구제 사역을 전담할 일꾼(집사)들을 따로 세웠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택하며 교회 업무를 분담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다. 그는 단순히 봉사를 위해 선택된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적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로 묘사되고, 최후에는 돌에 맞아 죽기까지 복음 진리를 증언했다. 그는 첫 번째로 순교한 사람이자, 한 집사로서, 복음의 진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울(바울)은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선교의 사도로 변화되는 강력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즉, 집사 스데반의 헌신과 순교는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스데반의 일화를 통해,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들이 곧 "후방 지원" 이상을 넘어서는 영적 전선의 선두에 서 있는 존재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세상은 돈과 권력, 유혹으로 가득 찬 광야 같은 곳이기에, 봉사하며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적 전투의 한가운데 설 때가 많다. 결국 봉사는 가벼운 일거리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그 사람 자신이 물질적 유혹이나 명예심에 사로잡혀 무너질 수 있는, 매우 치열하고도 위험한 자리일 수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디아코노스(집사)를 세울 때,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조금 더 영적으로 성숙하고, 말씀과 기도에 충만하며, 세상적 욕심을 멀리하고, 교회가 맡겨준 재정과 구제 업무를 투명하게 담당할 수 있는 인격자여야 했다. 믿음도 검증되고, 세상 욕심에 넘어갈 위험이 적은 사람을 세웠던 것이다. 그만큼 봉사는 교회의 후방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한다.
교회가 교회답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배하는 자, 기도하는 자, 가르치는 자, 봉사하는 자"가 균형 있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본다. 이는 일종의 4대 기둥과도 같은 구성 요소다. 예배하는 자는 목사나 예배음악 사역자 등,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이끌고 섬기는 역할을 맡는다. 기도하는 자들은 영적 전선을 견고히 하며,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로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돌보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르치는 자들은 교회를 지적인 측면에서 무장하게 함으로, 이단이나 세상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를 분별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자들은 교회가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손발로서, 물질적/육체적 영역을 책임지며, 사랑과 섬김의 실천적 모델이 된다.
장재형 목사가 늘 경고하는 바는, 교회 안의 다양한 직분과 은사가 충분히 발휘되려면, 결국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신앙의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시편의 질문처럼,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으면 어떤 은사나 직분을 맡아도 유혹의 바람이 불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신앙의 기초를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을까? 바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며,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신령과 진리로 무장한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삶의 최우선 과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맡은 어떤 사역이나 봉사가 개인적 명예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거대한 구원사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다양한 은사와 직분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대사명(Great Commission)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도구다. 즉, 교회 내적 공동체성을 세우는 동시에,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마 28:19-20)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은사나 직분은 의미가 반감된다. 본래 교회는 "에클레시아(Ecclesia)", 곧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어진 자들'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교회에 모인 이들은 다시 세상으로 파송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세우고 돌보며 예배하고 기도하는 데 그친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곧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직분과 은사는 교회 공동체가 "내부적인 성장(성도의 온전케 됨)"과 "외부로의 확장(복음 전파)"을 함께 이룰 수 있도록 부여된 것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는 메시지는, 교회가 아무리 커지고 프로그램이 다양해져도, 복음 전파와 봉사, 그리고 참된 예배의 본질이 흐려진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근본 기둥이 훼손되고 있다는 경고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평가받는 날에, 주님은 우리의 지위나 성과만을 보시지 않는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은사와 직분으로 무엇을 했느냐? 그 은사를 통해 얼마나 충성되이 나와 내 나라를 섬겼느냐?'를 물으실 것이다. 그 물음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우리의 은사를 다시 바라보고, 그것을 봉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교회 안의 은사와 직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여하신 아름다운 선물이며, 동시에 막중한 책임의 짐을 함께 지는 도구이기도 하다. 사도와 선지자, 교사와 목사, 그리고 집사 등등, 모든 직분이 결국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확장해나가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 위에 선 모든 성도는 저마다의 재능과 열정을 통해 교회를 섬기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타인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의 지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히 서로를 섬길 때, 교회는 진정한 '유기적 공동체'로 설 수 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2. 종말론적 시각과 대사명
베드로후서 3장 3~13절은 종말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의 날이 어떻게 임할 것인지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 변동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비웃을 것이라 예고한다. 이들은 역사를 단순히 순환론적으로만 파악하여, 과거도 현재도 별 차이가 없으니 미래 역시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역사를 순환론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주권 안에서 목적지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종착점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주의 날"에 주어진 완성의 시점이다.
베드로는 노아 시대를 예로 들며, 당시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사람들은 방주를 예비하라는 노아의 경고를 비웃었고, 결국 갑작스러운 홍수가 닥쳐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 멸망을 당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기대나 이해를 초월해 이뤄진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에 인류가 되도록 많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다만 그 시간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더디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말하듯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면, 그날은 도둑같이 임하게 될 것이다. "도둑같이"라는 표현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인간의 예측을 벗어난 방식으로 일어나는 사건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앙인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하나님의 '그날'을 긴장감을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하나 더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소망은 결코 막연한 공포심이나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은 결론이 "멸망"이나 "허무"가 아니라,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긍정적인 완성이다. 이는 결코 현세를 포기하고 단지 내세만 바라보는 소극적 자세로 귀결되지 않는다. 도리어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3장 11절에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물으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종말론적 신앙은 이 땅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현세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 '종말론적 시각'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교회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 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하는가? 왜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세워야 하는가? 왜 지역사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에게 다가가는가? 그것은 바로 지금의 세상 질서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이나 문화도, 돈이나 권력도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곧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의를 세상에 알리고,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신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대로, 교회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고 예고하는 '미리 맛보기'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종말론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예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 즉,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은 종말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다.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종말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단순 추측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열방에 전하는 일을 통해 역사 완성을 준비하고 가속화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선교의 열정에 불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지 교회 규모를 키우거나, 개인의 영달을 이루기 위한 전도가 아니라, 온 인류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큰 뜻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장재형 목사는 이처럼 종말론과 선교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누차 역설한다. 많은 이들이 '종말'을 두려움과 회피해야 할 대상처럼 여기지만,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철저히 "복된 소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복된 소망이 구체화된 비전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물론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로 인해 왜곡되고, 고통과 불의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종말의 희망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정의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할 것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선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올 것을 믿으며, 실천적 삶을 이어간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 3:11)는 질문은 우리에게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회개하지 않고 방종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미리 맛보며 거룩과 경건을 실천할 것인가? 우리가 대사명(Great Commission)을 붙들고 복음을 전하며, 공동체 안팎에서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은 결국 이 종말론적 결단의 한 형태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관점으로 온 우주와 역사를 운영하시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간이 길고 멀게 느껴질 수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다고 느껴져 지치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는 말씀이 우리를 다시 깨운다. 그날은 반드시 오며, 그날이 오면 그리스도 안에서 수고하고 헌신한 모든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가르치는 종말관을 통해, 교회가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함을 재차 강조한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 구원만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개인의 내면적 회심에서 출발하여,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 나아가 온 세계로 확장된다. 이 확장은 "역사의 구원"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개인의 구원만을 좁게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역사를 바꾸고 개혁하는 일에까지 책임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말씀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명백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빛은 어둠을 밝혀 길을 보이게 한다. 교회가 그 역할을 포기한다면, 세상은 길을 잃고 더 큰 혼돈에 빠질 것이다.
종말론은 우리에게 "세계 선교와 사회 변혁"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겨준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의 땅을 버려두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가려는 열정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때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가치를 전하고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혹은 교회 안에서 가난한 자를 섬기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며 작은 것부터 변화를 시도하는 형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한다"는 명제가 결코 미래에 대한 동경이나 공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힘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이 삶의 어느 영역에서 활동하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애쓰는 것이야말로 "종말론적 영성"의 핵심이라고 한다. 기업에서 일하는 자라면 정직과 투명성을 지키고, 정치나 공공 영역에서 활동하는 자라면 정의와 공익을 우선하며, 가정에서는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고,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는 창조적이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곧 그가 말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기독교인"의 태도라는 것이다. 모두가 불안한 시대와 사회라고 말하지만, 종말론적 소망이 분명한 사람들은 자기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종말의 날에 나타날 영광을 미리 예고하는 예표가 된다.
베드로후서 3장 3-13절)는 말씀은, 최종적인 역사의 귀결점이 어디인지를 지시해준다. 신앙인은 그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날을 바라보며, 오늘 이 순간에도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는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며, 교회 안의 은사와 직분, 그리고 봉사의 모든 행위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장재형 목사가 종종 예화로 드는 것이 있는데, 배가 항해를 할 때 목적지가 불분명하면, 중간에 방향 전환을 제때 하지 못하고 암초에 부딪히거나 표류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분명한 목적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체화된다. 교회는 그 목적지로 가는 항해를 함께하는 공동체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은 항해의 도구들이고, 대사명을 이루기 위한 엔진과 동력이다. 배 안에는 선장 역할을 하는 사도적 리더십도 필요하고, 항로를 읽어내는 예언자적 안목도 필요하다. 때로는 승조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교사도 있어야 하며, 선내의 구체적 식량이나 물자, 청소, 위생 등을 책임지는 봉사자들도 필수적이다. 이 다양한 직무가 유기적으로 협력해야만, 배는 순풍을 만난 듯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나라, 곧 '의와 사랑, 영광'이 충만한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행하는 모든 사역과 봉사는,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주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날이 더디 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오래 참으셔서 더 많은 이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중이다. 그 사랑을 알기에, 교회는 멈추지 않고 복음을 외쳐야 한다. 복음에 무지한 이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고, 이미 교회에 등록했지만 믿음이 식은 이들을 향해서는 다시 한번 말씀과 성령으로 깨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교회는 성령이 주시는 운동력으로 끝없이 움직여야 한다. 한곳에 안주하거나 스스로를 보존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그것은 이미 활력을 잃은 공동체에 불과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이 깨어 있음은 종말론적 깨어 있음이자, 선교적 열정을 품는 깨어 있음이다. '이 시대가 영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살피며,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태도다. 거기서부터 우리가 이어 가야 할 길은 선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향해 달려가는 선교적 실천, 교회 내에서 서로 은사를 통해 봉사하며 세우는 사랑의 공동체성, 그리고 종말에 대한 분명한 믿음으로 현실을 꿋꿋이 견뎌 내는 영적 용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의 날'을 준비하는 방식이며, 베드로후서 3장이 제시하는 경건한 삶의 구체적 그림이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과 은사는 대사명과 종말론적 전망을 향해 있어야 한다. 은사와 직분이 '나'라는 개인의 능력 과시나 자기 확장 수단으로 전락하면, 교회는 갈등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고, 봉사의 기회로 삼을 때, 교회는 놀라운 연합과 시너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 연합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은 점점 확고해지고,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는, 역사와 사회를 구원하려는 거대한 비전으로 확대된다. 이 비전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 동력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처한 다양한 도전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것이 교회가 더욱 깨어 일어나서 세상을 섬길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역설한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성경 안에 주어진 '거대한 빛'의 비전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 빛이 밝아질수록, 세상의 어둠은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산될 것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날은 멀리 있는 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도 수많은 교회와 성도를 통해 복음의 빛을 비추고 계신다.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가르치고, 봉사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결코 헛되지 않다.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수고와 헌신은 주의 나라 확장에 동참한 거룩한 발자취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사모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1세기 교회에만 유효했던 말씀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생생한 진리다. 세상의 조롱과 냉소가 계속될지라도,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도래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함께 맞이하기 위해, 더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동원하여 서로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자, 사도적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은 사명이다.
교회의 모든 활동이 이 '종말론적 지향'과 '선교적 목적' 위에서 재정의될 때, 우리는 더욱 분명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혼란, 혹은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들도, 이러한 본질을 되찾는 과정에서 점차 해소될 수 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고, 그 방향으로 전진하는 교회는 결코 표류하거나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펼쳐지며, 그 의와 평강이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 직분과 은사를 통해 돕고 세우는 모습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예고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비단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또 앞으로의 미래에도, 교회가 붙들어야 할 영원한 표준이다.
이 모든 과정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다시 다짐한다. 우리의 직분, 우리의 은사, 우리의 헌신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며, 동시에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따라 선을 행하되, 지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이라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 길에서,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우리 시대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바는 동일하다. "낙심하지 말라. 주님이 약속하신 그날은 결코 더디 오지 않는다.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처럼,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기도하고, 예배하고, 가르치고, 봉사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우리는 모두 동역자다. 어느 누구도 혼자 힘으로 갈 수 없으며, 서로에게 의지하여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 연합과 협력 속에서, 교회는 비로소 주님이 원하시는 그 아름다운 형상을 드러낼 수 있다.
베드로후서 3장 3~13절에 나타난 종말론적 전망은 "경건한 행실과 거룩함"(벧후 3:11)을 강조한다. 이는 단지 개인의 경건 생활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의 내면적 거룩도 매우 중요하지만, 교회가 사회와 역사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기능하는 '공동체적 경건', 즉 정의와 사랑과 돌봄이 충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필수다. 여기에는 교회 안에서의 기도와 예배, 말씀 교육, 다양한 봉사활동, 그리고 세상 속에서의 직장 생활이나 가정 생활, 사회적 책임 등 모든 영역이 포함된다. 그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장이 된다. 그렇게 보았을 때, 교회와 세상이 결국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변하고, 세상의 고난을 교회가 짊어지며,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가는 긴 여정이 펼쳐진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사의 전 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장대한 구원의 드라마에 부름받은 배우요, 일꾼이다.
교회는 은사와 직분을 통해 서로를 섬기며, 대사명에 헌신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종말론적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에클레시아'다. 직분과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그 목적은 봉사와 사랑, 그리고 복음의 확장이라는 데 있다. 또한, 역사는 직선적으로 흘러가며, 결국 주님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믿는 신앙인은, 이 땅의 현실 속에서 거룩함과 경건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결코 종말론적 신앙이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변혁'과 '사명 완수'로 이어진다는 점이 핵심이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가르치고, 봉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날이 오면, 우리의 헌신은 생명책에 기록된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할 것이며,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새롭고 완전한 삶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이 지닌 가장 큰 기쁨이고, 교회가 붙들어야 할 확고한 소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