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잇는 다리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장 6-8절과 요한복음 21장 18-23절은, 겉보기에 서로 멀리 떨어진 텍스트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 중 마지막 복음서이며, 이후 바로 이어지는 책이 사도행전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은 마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잇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이라고 종종 설명된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가 20장으로 충분히 완결된 구조를 가진 것처럼 보임에도, 21장이 추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고,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미래의 사역과 운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이 부분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시작,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도행전 1장 6-8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6-8)
여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묻는다.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완전히 회복되는 때"를 말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게 했던 역사의 어두운 국면 이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다시금 '이스라엘의 회복', 즉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소망을 구체적으로 품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 그 종말, 혹은 결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 시점은 인간이 예상하거나 특정할 수 없는 시점이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21장으로 넘어가면, 이 '때와 시기에 대해 인간이 알 바 아니라'는 정신이 다시 언급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요한복음 21장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뉘어 있다고 자주 설명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에서 나타나시어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져라" 하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그물을 가득 채우는 '풍어'(153마리 물고기)의 사건이 일어난다(요 21:1-14).
-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는 장면에서, 부인했던 베드로를 '목양 사역'으로 회복시키시는 이야기가 등장한다(요 21:15-17).
- 이어지는 세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고,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사도 요한)의 미래에 대한 암시, 나아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3)라고 말씀하시며 종말과 재림에 대한 중요한 언급을 하신다(요 21:18-23).
이 중 특히 요한복음 21장 23절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이후 마지막으로 남긴 언급 중 하나라고 종종 해석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전 마지막 말씀은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었다(It's finished)"이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메시지로는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이 큰 무게를 갖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순교의 길을 암시하시면서("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요 21:18), 그리고 "나를 따르라"(요 21:19)라고 명령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 요한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하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며 말씀을 주신다. 이는 사도행전 1장 7절에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는 말씀과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처럼 "때와 시기"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질문이 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인간이 함부로 간섭하거나 예측할 문제가 아니라고 명쾌히 못 박으신다.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오늘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목사는 이 본문들(행 1:6-8, 요 21:18-23)이 "종말"과 "대사명(Great Commission)"을 하나로 연결짓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석하였다. 그가 주목하는 지점은, 예수님께서 종말이나 재림의 구체적인 시점을 숨기신 이유가 바로 '교회와 성도의 선교 사명'에 더욱 철저히 초점을 맞추게 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부분의 대화가 사도행전 1장에서의 예수님의 승천 직전 말씀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자세가 종말의 '시기'를 계산하거나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될" 그 부름에 충실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대주의 종말론'(Dispensationalism) 또는 여러 신비주의적 종말론에서 특정 날짜를 계산하거나 종말 시나리오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안다"(마 24:36)고 하신 말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다"(행 1:7)라는 선언은, 종말 시점에 대해 인간이 함부로 미리 결정적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요한복음 21장 22-23절에 언급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는 말씀이 초대교회 시절 요한이 살아 있는 동안 재림이 임할 것이라는 오해를 낳았지만, 이는 오히려 "그 시기는 우리 알 바 아니다"라는 주님의 근본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 21장을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연결되는 중요한 '이행 장면'으로 해석한다.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목양과 순종'을 통해 제자들을 회복시키시고, 동시에 '종말에 대한 궁극적 지침'을 부여하신다. 그리고 그 지침은 사도행전 1장으로 이어져,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과업을 감당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1장 6-8절에서 언급된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는 증인이 되라는 명령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들은 '종말과 재림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21장과 사도행전 1장은 서로 다른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복음서 시대에서 교회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점에 두 본문이 놓여 있음으로써 매우 중요한 신학적·목회적 함의를 제공한다. 즉 종말과 재림은, '알 수 없는 때'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확실한 약속'을 붙잡고, 제자와 교회가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목양적 사명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증인이 되라"는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2.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우리의 대사명
사도행전 1장 6-7절에서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때"에 대해 묻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답변하신다. 이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초대교회 시절에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종말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완성될지를 궁금해하고, 때로는 그 '시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잘못된 기대나 예언을 내놓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차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하심으로써, 재림의 구체적 시점은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임을 분명히 하신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실제적인 가르침을 준다고 해석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드라마는 결국 '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귀결된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통치를 두셨고("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 출 3:14), 에덴동산에서 인류와 교제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왔고, 그로 인해 세상에 무너짐과 고통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곳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다시 임할 것이라는 예언과 약속이 이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야훼의 날, 즉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정의와 평화가 충만한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신약시대에 이 약속이 더 구체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실현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메시지의 핵심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 나라가 언제 회복됩니까?"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답하시는 대신,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하셨고, 이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신다(행 1:8). 요한복음 21장에서도 같은 정신이 드러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순교를 예고하신 뒤, 옆에 있던 요한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때 예수님은 간단명료하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요 21:22).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을 함부로 계산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시점, 모든 역사의 최종적 완성 시점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속해 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즉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행 1:8),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목양적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집중하지 않으신다. 대신 우리를 '복음 전파와 목양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이처럼 요한복음 21장과 사도행전 1장이 만나는 지점은, 종말론적 관심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구체적 순종과 사명 감당'으로 돌리는 신앙적 전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의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한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명령이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때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반복하신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내 양'이라고 부르신 양 떼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목양을 맡은 자는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종'일 뿐이며, 궁극적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교회 역시 예수님의 몸이며, 예수님의 소유이다. 베드로가 이 명령을 듣고, 자기의 앞으로의 삶이 순교로 이어진다는 것(요 21:18-19)을 알았음에도 담대히 그 길을 걸어갔다는 전통이 초대교회 안에 전해진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마태복음 4장에서 베드로가 처음 제자로 부름받았을 때의 그 명령("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과 같은 표현이지만, 이제는 훨씬 깊은 차원의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가셨고, 부활하셨고, 이제 베드로도 그 길에 동참해야 한다는, 운명적이고 희생적인 부르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는 예언적 말씀(요 21:18)은, 후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를 당했다는 이야기와 맞닿는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베드로가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로 이 말씀의 성취를 기억했고, 요한복음 21장 19절은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베드로의 순교가 예수님의 순종을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음을 시사한다.
흥미롭게도 복음서들은 대체로 다른 사도들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책 후반부인 사도행전도 사도들의 전체 순교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 전승은 대부분의 사도들이 순교의 길을 갔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도들이 "내 양을 먹이라",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생명으로 여기고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순교적 삶은, 우리가 가진 오늘날의 신앙도 단지 '학문적 지식'이나 '사회적 문화'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생명을 내어놓는 순종의 전통 위에 서 있다는 점을 각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요한복음 21장이 '종말', '부활 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그리고 '제자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한다면,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승천', '성령강림의 약속', '교회의 사명 시작'을 구체화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두 본문이 "복음서 시대에서 교회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강조한다. 요한복음 21장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은, 종말 시점에 대한 인간적 호기심에 매몰되지 말고, 주님이 부르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제자의 길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7절,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는 말씀으로 구체화되면서, 교회가 담당해야 할 대사명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제시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명령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종말을 기다리는 방식이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지상에서 이루어가는 실제적인 길인 것이다.
성경의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 메시지를 반복한다. 마가복음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선언하고, 마태복음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한다(마 28:19-20). 이 명령이 바로 '지상대명령'(Great Commission)이다. 마태복음은 동시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위로의 말씀을 붙임으로써, 비록 그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주님의 동행하심이 언제나 있음을 약속하신다.
이렇게 볼 때, 종말은 두려움이나 미지의 공포가 아니라,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의 방향이고,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대사명을 재확인하게 만드는 기폭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내가 다시 오리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제자들에게 '그 날이 임박했으니 금방 온다'는 단순 예고가 아니라, '내가 언제 오든지 너희는 깨어 있고,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권면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작은 지역조차도 완전히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재림이 임박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즉, 언제나 '재림이 임박했다'는 자각으로, 우리는 시간과 기회를 허비하지 말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계속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종말론을 대할 때,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를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그 중심에 "재림의 시기 계산이 아닌, 주어진 사명의 성취"가 있다고 말한다. 교회사는 이미 여러 번의 잘못된 종말 예언과 종말 시나리오로 인해 큰 혼란과 부작용을 겪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날과 그 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라는 질문보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명령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느냐?", "주님께서 맡기신 양을 잘 돌보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이것이 곧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에 담긴 핵심이며, 사도행전 1장 8절의 선교 지향적 메시지와 그대로 연결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하시고, 베드로가 그것에 대한 구체적 두려움이나 혼란보다는 "다른 제자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엉뚱한 관심을 보일 때, "네가 그것을 왜 신경 쓰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자주 벌어지는 비교, 시기, 불필요한 호기심을 정면으로 다루는 본문이기도 하다. 결국 "너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가신 길을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종말의 때를 비롯해 다른 사람의 인생이나 운명에 과도하게 간섭하려 하거나, 쓸데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태도는 예수님 보시기에 부질없는 일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현대 교회 역시 이런 본문 앞에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특별히 '종말론'이라는 주제를 들먹이면서 '정치적 해석' '역사적 사건 징조 분석' 등에 골몰한 나머지, 정작 주님이 맡기신 '양을 먹이는 일'과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부르심이나 운명을 지나치게 궁금해하고 관여하느라, 정작 내게 맡겨진 사명은 놓치는 경우도 있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의 교훈이란, 개인의 운명에 일희일비하거나 신비적 예측에 사로잡히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 거기에는 '네 자신의 모든 것(심지어 순교까지)을 바쳐야 할 수도 있다'는 묵직한 암시가 뒤따랐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결국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리더로서 자기 삶을 마쳤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태도로 살았음을 우리는 그의 서신서들에서 발견한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기 인생이 순교로 끝나든 더 오래 살든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상태에 있었다. 이 점에서 베드로와 바울은 같은 영적 수준, 곧 '언제 죽을지, 어디로 인도될지 알 수 없어도, 끝까지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러한 '순교 정신'은 단지 초대교회 시대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물론 우리가 사는 환경은 예수님 시대나 초대교회와 다르다. 정치적 박해를 직접 받지 않을 수도 있고, 성직자나 특정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다양한 직업과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증거한다. 그러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 삶을 전부 내어놓는 마음가짐, 그리고 "때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이 명령하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태도는 여전히 동일하게 요구된다.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런 정신을 지닌 성도들의 '작은 순교(생활 속 헌신과 희생)'를 통해서도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 18-23절이 말하는 종말론적인 메시지와 사도행전 1장 6-8절이 제시하는 대사명적 메시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양을 먹이고(목양),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재림이 언제인지, 어느 날짜에 일어날지를 추측하는 것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고, 또한 우리의 신앙 의무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종말론'은, 바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오늘 내가 할 일'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 일은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맡기신 양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주님은 우리가 끝을 준비하길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 올지 모를 그 재림의 때까지 '증인으로서의 삶'을 지속하길 원하시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은,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할 종말 신학의 바른 태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교회가 종말의 때까지 붙들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사명 선언이다. 오늘날 다양한 문화와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교회는 이 명령에 순종하며,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대로,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작은 예수"로서 살아야 한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말로만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목양'과 '헌신'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러한 증인의 삶이야말로, 종말을 올바로 대비하는 삶의 태도이자,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점진적으로 임하도록 협력하는 길이다.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에 가까운 말씀(요 21:23)과 사도행전 1장의 "너희가 알 바 아니니,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가르침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교회가 종말과 재림을 대하는 바른 관점을 확립해준다. 우리는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기보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과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는 사도로 부름받았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재림 때와 관련된 모든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우리의 시선이 오직 순종과 사명 감당에 고정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으로 권능을 받아 증인이 되라" 하신 그 대사명은, 교회가 역사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될 최우선 순위다. 이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며, "너희가 알 바 아닌 때와 시기" 대신, "너희가 힘써야 할 본분"에 충실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교회가 종말과 미래에 대한 몽상에 빠지지 않고, 지금 주어진 시대적 상황과 환경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전도, 선교, 목양을 하는 '살아있는 증인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종말이 '언제'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종말이 '어떻게' 임하고,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기다리며 순종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21장의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이런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증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주님께 순교 예고까지 듣고도 뒤돌아 '다른 이는 어찌됩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네가 알 바 아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그를 다시금 제자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 길을 충실히 걸어갔던 결과가 바로 교회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복잡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이고, 예수님의 명령도 분명하다. 복음을 전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날이 언제 임할지 알 수 없어도, 순교까지도 각오하고 이 길을 걸어가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직접 보이신 십자가의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도들, 초대교회 성도들, 역사 속 숱한 믿음의 선배들이 그 길을 이어 갔다. 이들의 뒤를 이어 오늘날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회복되는 그날까지 동일한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21장 25절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나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말하며 복음서를 맺는다. 이는 예수님의 하신 일이 무궁무진하고, 복음의 메시지가 끝없이 확장된다는 의미다. 사도행전은 그 확장을 기록하기 시작하지만, 사실 그것은 지금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이야기다.
종말과 재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신앙 태도는 "오늘 우리의 삶과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시대적 조건이나 환경적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은, 불필요한 논쟁이나 시기, 남의 운명에 대한 지나친 관심, 혹은 종말 시점을 향한 과도한 집착에 경종을 울리며, '주님의 길을 따르는 데 집중하라'는 초대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선언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결국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임을 재확인시킨다. 이 능력 안에서 교회는 열방을 향해 나아가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복음서(요한복음)와 교회사(사도행전)가 연결되는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환경 속에서 선교, 목양, 헌신의 삶을 살 것을 촉구받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와 시기는 너희 알 바 아니니라"라는 경고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준다. 즉, 시시때때로 '종말 날짜'를 맞추려는 노력을 끊고, '오늘 내게 주어진 사명'을 전심으로 감당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자연스레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교회가 역사 속에 담당해야 할 역할을 실행하게 된다.
장재형목사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교회사는 이미 이러한 대사명의 성취 과정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수많은 핍박과 박해, 내부의 분열과 이단, 세속적 유혹 등이 언제나 존재했다. 그러나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사랑의 명령과,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증인이 되라"는 선교의 과제는 교회의 정체성이며, 역사적 사명이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다른 사도들과 교부들, 개혁자들, 선교사들, 평신도 성도들의 땀과 눈물, 심지어 목숨을 건 헌신을 통해 이 일은 계속 이어져왔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 흐름 속에 서 있다.
종국에 가서 모든 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리라." 성경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통해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계 21:4)는 궁극적인 약속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날 전까지, 교회와 성도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받은 명령과, 사도행전 1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동시에 부여받고, 충실히 그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은 '시기'를 모른다고 해서 멈추지 않으며, "알 바 아닌 것에 집중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지키는 자들"을 통해 진행되고 완성된다.
요한복음 21장과 사도행전 1장이 연결되어 말하는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우리의 대사명"은, 결코 분리된 주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언제입니까?"(행 1:6)라는 질문과,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 21:21)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모두 우리의 '인간적 관심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노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가 알 바 아니다"라는 단호한 태도로, 우리의 시선을 '복음 전파'와 '목양의 현장'에 고정시키신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능력으로 성령을 약속하신다. 이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똑같이 적용해야 할 지상 명령이다. 결코 난이도가 낮은 일이 아니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면 가능한 일이 된다. 초대교회 때처럼, 지금도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뛰어넘어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고,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경종이자 도전이다. 교회가 종말을 이리저리 재단하려는 시도나, 다른 사람의 운명을 재단하는 시도, 혹은 세대주의적 도표를 통해 시나리오를 예언하는 일 모두가 합당하지 않음을 일깨운다. 반대로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적 책임과 "오직 성령으로 증인이 되라"는 선교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임을 확인시켜 준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런 점을 수차례 강조하며, "교회가 대사명 성취에 집중할 때, 결국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해설한다. 우리가 알 바가 아닌 '시기'를 두고 혼란스러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일에 진력하라는 것이다.
이 자세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참된 종말론적 삶이며, 동시에 교회가 사도행전 1장 8절을 통해 부름받은 대사명적 삶이다. 두 본문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면서,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과, 앞으로 있을 재림을 잇는 '현재 시점'의 신앙실천을 지시한다. 마치 요한복음 21장이 복음서 전체의 마무리 같으면서도, 사실상 교회의 사도행전적 시대를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그 교회의 역사적 흐름 안에 서서, "복음 전파와 목양의 사명"이라는 소중한 다리를 놓고 있다. 이 다리를 통해 한 영혼, 또 한 영혼이 하나님 나라로 인도되며,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교회는 더욱 그 사명에 불붙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 길의 끝에,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결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들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시기와 때'가 아닌 '주님이 맡기신 사명'에 민감해져야 한다. "주님, 언제 오십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주님, 저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제가 어떻게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신앙 태도가 바람직하다. 그 답변은 이미 성경 속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 양을 먹이라."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1장과 사도행전 1장이 보여주는 이 연결고리가, 우리 일상의 현장에서 늘 살아 역사하기 바란다. 그것이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다.
장재형목사가 설명하듯, 교회가 이 소명을 붙들고 달려갈 때, 종말에 대한 불필요한 두려움이나 인간적 호기심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언제 오시든,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사명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세상과 문화를 변화시키며, 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베드로가 순교까지도 기쁨으로 감당했던 것, 바울이 "죽음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성도들이 자기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해온 역사는, 바로 "재림의 날과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그 구체적 시기를 알려고 애쓰지 않고, 이미 주어진 명령에 충성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우리도 그 똑같은 길 위에 서 있다.
따라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깊이 붙잡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가져야 할 결단이다. 그 길은 쉽지 않을 수 있으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주님의 약속이 동행한다. 전 인류가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되는 그날을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 대사명은, 결국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역사 속에서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붙들어야 할 '신성한 의무'이자 '거룩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각자도 베드로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고백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 '때와 시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다. 그러나 "내 양을 먹이라"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은 분명히 우리 몫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놓치지 않을 때, 요한복음 21장이 사도행전 1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가 말하는 종말론적 비전을 뚜렷이 바라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며,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우리의 대사명"이 어떤 관계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종말의 때를 묻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그 길에 참된 기쁨과 영원한 상이 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그 길을 걸어갔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이 길을 걸으며 교회를 세우고 있다. 우리 역시 이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충실한 청지기와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 23절과 사도행전 1장 6-8절이 우리에게 동시에 들려주는 음성이며, 교회 공동체와 모든 성도가 품어야 할 신앙의 방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