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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이기는 삶, 장재형목사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의 설교는 로마서 13장을 관통하는 윤리와 종말론의 결을 한 줄로 이어 붙인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로마서 12장 21절의 요청이 장과 절의 구분을 넘어 13장으로 유기적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점에서, 그는 본문을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제한된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조망하는 큰 구조로 읽어 낸다. 그에게 로마서 13장은 단지 시민적 의무를 열거한 텍스트가 아니라, 세상 권세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복음적 양심, "빛의 갑옷"을 갖춘 정체성,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결론으로 수렴되는 성화의 로드맵이다. 이 설교의 핵심은 이원론적 도피가 아니라 성육신적 참여, 즉 하늘의 시민권을 지닌 이가 이 땅의 법치와 공동선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날마다 삶으로 증언하는 긴장 속에 선다는 데 있다.

그 긴장은 먼저 권세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면서도, 그 근거를 단순한 공포 정치의 효율성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질서가 무너진 무정부 상태보다 최소한의 정의와 안전을 보장하는 법치가 공동체를 위해 낫다는 현실적 통찰을 전제하면서, 그리스도인이 형벌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대목을 파헤치며, 복종의 동기가 외적 강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내적 정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양심의 주인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세금, 치안, 공적 서비스라는 현실의 혜택을 누리는 만큼 정당한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되, 불의에 협력하라는 강요 앞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도행전의 원리를 기억한다. 이것이 세상 권세를 악마화하거나 신격화하지 않는 성경적 균형이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전장의 결론이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연장되는 방식이다.

예수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선언은 이 균형을 압축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이중 국적의 비유로 풀어낸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교회는 이 땅의 도시에서도 책임 있는 시민으로 서야 하며, 공적 규범을 경멸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 충성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그가 말하는 책임은 소극적 순응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시민성은 적극적이다. 세금 회피, 음성 경제, 사적 이익을 위해 법망을 이용하는 영리함을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공공선에 이바지하는 기꺼운 납세와 투명한 직업 윤리로 사회를 섬기는 것이다. 이는 단지 도덕적 미덕의 장식이 아니라 신학적 진술이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므로,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웃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선대하는 행위가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

이처럼 공적 책임의 장에서 바울은 곧장 사랑의 빚을 이야기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장재형목사는 이 문장을 수사적 문구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이 윤리의 정점이자 율법의 완성이라는 바울의 선언을 삶의 회계장부로 가져온다. 사랑의 빚은 만기일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출근, 공부, 연구, 장보기, 세금 신고 같은 일상적 단면에서 사랑의 의무를 갚아 나가야 한다. 대학생이라면 시험 기간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동료를 짓밟는 경쟁 대신 공동 학습과 공정한 협업을 선택하는 용기가 포함된다. 직장인이라면 성과를 위해 타인의 노고를 가로채지 않겠다는 결심, 스타트업 창업자라면 초기 투자와 인건비를 "버틸 수 있을 만큼만"이 아니라 "정직하게 지급할 만큼"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구체 동사이며, 회계 가능한 윤리다. 바울이 열거한 금지 목록-간음, 살인, 도둑질, 탐심-이 이웃 사랑의 반대항이라면, 사랑은 이 네거티브를 비워낸 자리만큼이나, 그 자리를 선한 행위로 채우는 포지티브의 연속이다.

여기서 바울은 시간을 불러온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장재형목사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구분을 통해 이 구절을 해석한다. 크로노스가 흐르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관통하는 때다. 시험 일정표, 프로젝트 마감, 납부 기한 같은 크로노스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카이로스를 감지하는 눈은 신앙의 근력으로 길러진다. 그 눈을 가진 사람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갑옷을 방어적 신중함과 공격적 선행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음주 문화의 압박에 휩쓸리지 않는 절제, 늦은 밤 화면 속 음란함 앞에서 의지를 소모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를 세우는 지혜, 라이벌을 묵살하는 조롱 대신 동료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겸손이 그 갑옷의 조각들이다. 이 빛의 갑옷은 내면의 신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구체 행위의 반복-루틴-으로 단단해진다. 밤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성찰과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는 습관, 일주일에 한 번 봉사의 시간을 달력에 고정하는 다짐, 악플을 달려는 충동이 올라올 때 10초만 숨을 고르고 친절한 언어로 바꾸는 훈련 같은 반복이 갑옷을 도톰하게 만든다.

바울이 열거하는 어둠의 목록-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 다툼과 시기-을 로마 거리의 환락과 경기장 문화의 거친 경쟁으로 비유할 때,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거울 앞에 우리를 세운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파티 문화, 소셜 미디어의 선정성과 비교 중독, 구독자 수와 조회 수로 환산되는 인정 욕구, 승진을 위한 내로남불의 합리화, 이 모든 것이 1세기의 로마와 다르지 않은 21세기의 도시 풍경이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명령이 순한 이미지의 강조가 아니라 전략적 전환임을 보여준다. 악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면 악에 지는 것이다. 흑색선전과 과장광고를 모방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빛의 갑옷을 벗어 던진다. 반대로 정직과 품질, 친절과 투명성이라는 선으로 버틴 기업과 기관, 개인은 느리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이 느림은 손해가 아니라 신뢰를 축적하는 속도이며,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승리의 가장 안정적인 길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명령은 이 설교의 결론이자 시작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옷의 은유가 신학적 정체성과 윤리적 실천을 동시에 포괄한다고 설명한다. 옷은 신원을 드러낸다. 졸업 가운, 작업복, 유니폼이 역할과 소속을 표지하듯,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사명을 몸에 두르는 일이다. 동시에 옷은 습관이다. 매일 갈아입지 않으면 더러워지듯, 그리스도를 입는 행위는 일회성 헌신이 아니라 매일의 결단이다. 아침에 일정표를 펴기 전에 짧은 기도로 "오늘의 이익보다 오늘의 진실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스스로에게 서약하는 루틴, 갈등의 회의에 들어가기 전 "나는 이긴다기보다 이해하려 한다"는 원칙을 되새기는 훈련,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입는 실천이다. 이때 "의의 옷"이라는 다른 성경의 은유가 함께 빛난다. 의의 옷은 내 공로로 재단한 맞춤 수트가 아니라 은혜로 덧입혀진 옷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을 과시하지 않고, 은혜를 감추지 않는다. 실패했다면 솔직히 시인하고 다시 입는다. 그 반복이 성화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이 명령의 능력을 증언한다. "집어서 읽으라"는 속삭임에 이끌려 펼친 성경에서 그는 이 구절을 마주했고, 광야 같던 내면에서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인용하여 말씀이 도덕적 조언을 넘어 존재를 각성시키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오늘도 누군가의 방탕은 회복으로, 중독은 절제로, 공격성은 온유로, 시기는 감사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이 변화는 의지의 영웅담이 아니라 은혜의 개입이며, 공동체의 품이 이를 지탱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설교 한 편으로 끝내지 않고, 성도의 루틴이 자리 잡도록 곁에서 동행해야 한다. 묵상과 기도의 리듬, 재정과 시간의 청지기 훈련, 사회 참여의 실습까지 연결해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럴 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말은 추상에서 구체로 내려온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면, 장재형목사는 무조건적 반항과 무조건적 맹종을 모두 경계한다. 그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권세가 악으로 기울 때 그리스도인은 폭력으로 맞서기보다 진리와 사랑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폭로와 고발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그 목적이 상대의 파멸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잃지 않는다. 직장에서의 내부 고발, 캠퍼스 내 부정 행위 제보, 지역사회의 환경 문제 제기 등에서 이 기준은 우리를 선한 지혜로 인도한다.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셨지만, 하나님은 불의의 방조자가 아니다. 권세의 합법성은 공의의 실천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신자는 법치를 존중하되, 법의 결함을 사랑으로 보완하고, 법의 남용을 진리로 제어하는 시민적 미덕을 길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종말론적 시야다. 종말은 공포의 서사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에게 종말론은 세계의 붕괴를 점치는 기술이 아니라, 오늘을 의미 있게 만드는 시간 신학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사는 우리는, 이미 시작된 구원의 효력을 오늘의 선택으로 증언하고, 아직 오지 않은 완성의 영광을 소망으로 견딘다. 이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인내의 에너지다. 연구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사업의 유동성이 위태로울 때, 관계가 삐걱거릴 때, 종말의 소망은 "지금의 성공/실패가 내 존재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큰 프레임을 제공한다. 프레임이 바뀌면 선택이 바뀐다. 더디더라도 정직을 택하고, 손해 같아도 친절을 선택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은 바로 이런 프레임 전환에서 가능해진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들려주는 로마서 13장의 메시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늘의 시민으로서 이 땅의 법을 존중하고, 양심을 따라 책임 있게 복종하며, 사랑의 빚을 기쁨으로 갚고, 다가오는 낮을 바라보며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이것은 신학적 선언인 동시에 생활의 문장이다. 오늘 카페에서 과제를 마감하는 학생에게, 회의실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팀장에게, 상점에서 계산을 마치는 점원에게,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부모에게, 그리고 혼자 스크린 앞에 앉아 유혹과 싸우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로마서 13장은 교회 예배당의 설교를 넘어, 우리의 일상 루틴 하나하나를 성전의 기둥으로 바꾸는 실천 강령이 된다. 그 실천이 쌓일 때, 교회는 더 이상 세상과 담을 쌓는 폐쇄 집단이 아니라, 도시의 밝기를 높이는 공공의 등불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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