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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로마서 7장, 죄와 싸우면서도 감사하는 믿음

보이지 않는 핏자국을 지우려는 두 손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이 되풀이하는 몸짓은 죄를 알아차리는 일과 죄에서 벗어나는 일이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로마서 7장 설교도 선을 원하면서 악을 행하는 곤고한 마음을 마주한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자신을 향한 절망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로마서 7장 7~25절이 비추는 것은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신앙의 내면이다.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하루가 한 사람 안에 함께 있다. 그 간극이 아픈 이유는 선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선을 원하면서도 그 뜻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그 모순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마지막 고백을 죄와 무능에 내어주지 않는다. 죄를 깨달은 마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며, 용서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까지 그 길을 잇는다.

율법의 빛이 숨겨 둔 마음을 비출 때

바울은 율법이 죄인지 묻고, 곧바로 그것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문제는 그 선한 말씀을 빌미로 사람을 속이고 죽음으로 끌어가는 죄의 간교함이다. 율법 때문에 죄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서, 보이게 한 말씀을 죄의 원인으로 돌릴 수는 없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그 차이를 드러낸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속 욕망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손이 저지른 일에서 멈추지 않고, 손이 움직이기 전에 마음이 무엇을 움켜쥐었는지까지 비춘다. 비교와 소비 속에서 끝없이 더 가지려 했던 마음은 말씀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듣는다. 탐심이라는 이름이다.

설교가 돌아보는 창세기 3장에서도 하나님의 금지는 사람을 해치기 위한 명령이 아니었다. 뱀은 보호를 위한 계명을 비틀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겼다.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면 금지는 빼앗김처럼 들리지만, 그 사랑을 신뢰하면 생명을 지키는 울타리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억압으로 왜곡하는 죄의 속임수다.

그렇다고 금지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 모든 욕망이 잠잠해지는 것은 아니다. 죄가 드러난 자리에는 오히려 더 선명한 갈등이 남는다. 율법은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알려주지만, 그 깨달음만으로 나를 건져내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서 죄를 비추는 말씀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함께 붙들어야 할 이유가 드러난다.

곤고한 믿음은 아직 선을 향하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탄식을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이어지는 성화의 갈등으로 읽는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에는 옛 습관과 죄의 성향이 남아 있다. 선을 향한 뜻과 원치 않는 행동이 어긋날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된다. 믿음의 고백이 진실할수록 그 어긋남은 더 아프게 느껴질 수 있다.

바울이 자기 안에 거하는 죄를 말할 때, 이 설교는 구원받은 사람의 정체성과 그 안에서 일하는 죄의 세력을 구별한다. 죄를 지었다고 해서 자신이라는 존재 전체를 버림받은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동시에 내 안의 죄가 한 일이라며 책임을 피할 수도 없다. 이 구별의 목적은 나를 변호하는 데 있지 않고, 버려야 할 죄를 분명히 하며 주님께 돌아갈 길을 붙드는 데 있다.

이 설교는 그러한 곤고함 속에서 거룩을 향한 갈망을 발견한다. 죄를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은 적어도 그 죄를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괴로워했다는 사실만으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을 향한 갈망은 죄를 자백하는 기도와 구체적인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면 마음의 자리가 분명해진다.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칭의는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며, 성화는 그 은혜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거룩을 배우는 여정이다.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고,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은 다시 시작할 소망을 지우지 않는다.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꾸미지도, 실패한 자신이 전부라고 단정하지도 않는 믿음이 그 사이를 걷는다.

회개는 자책을 지나 은혜로 향한다

죄 앞에서 마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숨을 수 있다. 은혜를 받았으니 괜찮다고 잘못을 합리화하거나, 흠 없는 신앙인처럼 보이려고 내면을 감출 수 있다. 한쪽은 계명을 버리고 다른 쪽은 정직을 버리지만, 둘 다 죄를 그대로 남겨둔다. 회개는 이 두 길을 멈추고 자신이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 사실대로 아뢰는 일이다.

설교는 율법을 거울에, 복음을 더러움을 씻는 것에 비유한다. 거울을 치우면 얼굴의 얼룩이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고, 거울만 들여다본다고 깨끗해지지도 않는다. 죄를 말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막연한 위로로 흐려지고, 죄만 말하면 죄인은 정죄 속에 갇힌다. 율법이 내 죄를 드러내는 자리에서, 복음은 나를 씻으시는 그리스도께로 이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신을 더 오래 괴롭히는 일과 같지 않다. 무엇을 탐했고 어디에서 순종을 거부했는지 인정하되, 그 인정이 그리스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 묵상은 남의 허물을 찾아내는 도구가 아니라 내 욕망을 비추시는 말씀 앞에 머무는 시간이 된다. 기도는 죄를 경건한 말로 포장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시간이 된다.

이 변화에는 매일의 실천과 인내가 따른다. 말씀을 묵상하고,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복음의 은혜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일은 한 번의 결심으로 대신할 수 없다. 성화는 긴 경주이기에 눈에 띄는 변화가 더디다고 걸음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 세운 결심을 믿고 버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죄를 이기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해야 한다. 오늘의 순종은 나를 구원할 공로를 보태는 일이 아니라, 이미 베풀어진 사랑에 삶으로 응답하는 일이다.

그 긴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의 모습도 달라져야 한다. 교회는 죄를 분명히 지적하면서도 돌이킬 기회를 주고, 함께 슬퍼하며 회복을 도와야 한다.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자리는 죄를 숨길 명분을 주는 곳이 아니라, 그 죄를 버릴 용기를 북돋는 곳이어야 한다. 자신의 곤고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의 실패 앞에서 쉽게 우월한 자리에 서지 못한다. 말씀으로 권면하는 엄정함과 다시 일어설 힘을 나누는 사랑이 함께 있을 때, 부끄러운 고백도 함께 기도할 이유가 된다.

감사는 싸움이 끝나기 전에 시작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 뒤에 바울은 감사를 고백한다. 자신의 의지가 강해졌다고 선언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해결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자신을 건지시는 분께로 옮겨간 것이다. 아직 원치 않는 악과 싸우는 사람에게 감사가 가능한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감사를 마음을 밝게 바꾸는 긍정적 자기암시와 구별한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죄 아래 팔려 있던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복음이 그 근거다. 죄의 유혹이 여전히 강하다는 경험과, 죄가 더 이상 성도의 최종적인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함께 붙들어야 한다. 오늘의 연약함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다시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

이 확신은 싸움을 면제해주는 허락이 아니라,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힘이다. 은혜를 신뢰하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실패를 끝없는 절망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할 이유가 줄어드는 만큼, 용서받은 사람답게 순종할 이유는 더 분명해진다. 감사는 죄와의 싸움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싸움 속에서도 나를 건지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고백이다.

말씀의 흐름은 로마서 7장의 곤고함을 외면하지 않은 채 8장의 자유와 기쁨을 바라보게 한다. 아직이라는 현실 때문에 이미 베풀어진 구원을 잊지 않고, 이미 받은 은혜 때문에 아직 남은 싸움을 소홀히 하지 않는 길이다. 그 길에서 감사는 죄를 인정하는 겸손과 함께 자란다. 죄를 더 정직하게 볼수록 용서를 더 깊이 구하고, 용서를 더 깊이 알수록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게 된다.

오늘도 마음은 말씀을 사랑하면서 그 말씀 앞에 부끄러울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잘못을 숨길 가면도, 자신에게 내릴 마지막 판결도 아니다. 죄를 인정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순종할 한 걸음이다. 나는 오늘, 이 곤고함을 숨기지 않은 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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